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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늘이 만든 경치' 사라지고, 흙탕물만 남았다 [오래 전 '이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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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동방진주 작성일20-10-26 00:30 조회12회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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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향신문]
2010년 10월 경북 상주시 중동면 회상리를 흐르는 낙동강에서 포클레인들이 준설공사를 위해 모래사장을 파헤치고 있다. 권기정 기자
2008년 12월29일, 경북 안동 영호대교 둔치에서 화려한 축포가 터졌습니다. 행사의 이름은 ‘낙동강 안동2지구 생태하천 조성사업 착공식’. 한승수 총리와 정종환 국토해양부장관, 이만의 환경부장관, 김관용 경북지사 등 유력 정치인들이 자리에 참석했습니다. 행사장 옆에선 환경단체가 반대 피켓을 들고 캠페인을 벌였지만 착공을 막을 수는 없었습니다. 한강·낙동강·금강·영산강에 보(洑)를 설치하는 대규모 정비사업, 이른바 ‘4대강 사업’이 첫 삽을 떼는 순간이었습니다.

흐르던 강을 갑자기 막으니 여러 문제가 생겼습니다. 녹조가 강을 뒤덮고, 자연이 만든 모래톱은 사라졌습니다. 바뀐 환경에 적응하지 못한 어류들은 죽어갔습니다. 4대강 착공 이후 2년이 흐른 2010년, 한 무리의 대학생들이 낙동강을 찾았습니다. 10년 전 이날 경향신문에는 <‘경천대’ 비경 간데 없고, 남은 건 흙탕물과 탄식뿐>이라는 기사가 실렸습니다.

2010년 10월26일 경향신문
이 기사는 ‘333 프로젝트’의 낙동강 현장답사를 동행 취재한 기사입니다. ‘333 프로젝트’란 버스 333대에 한 대당 33명, 총 1만 명의 시민이 4대강 답사를 할 수 있게 하자는 프로젝트입니다. 이원영 수원대 교수가 제안했고 주부, 종교인, 교수, 환경운동가 등 33명이 이끌었습니다. 기사에 소개된 답사에는 고려대 사회학과와 한국해양대 동아시아학과 학생들과 일반 시민까지 120여명이 참여했습니다.

이들은 이날 낙동강 지류인 내성천(경북 예천군)과 경천대(경북 상주시) 등을 돌아봤습니다. 내성천은 쏘가리와 은어가 사는 1급수 하천입니다. 강물이 회룡포마을 주위를 태극 무늬로 한 바퀴 돌며 절경을 자아냅니다. 이원영 교수의 설명에 따르면 “대한민국 강의 원형에 가까운 강”이라고 합니다. “영주댐이 건설되면 이 회룡포의 모습이 사라질지도 모른다”는 박창근 관동대 교수의 설명에 학생들이 안타깝게 탄식했다고 합니다.

2010년 10월23일 경북 예천군 회룡포에 모인 대학생들이 회룡포의 주변 경관을 관찰하고 있다. 권기정 기자
‘하늘이 만든 경치’라는 뜻인 경천대에 이르러서는 눈앞에서 벌어지는 환경파괴를 목격하기도 합니다. 기사는 2010년 당시 경천대의 모습을 이렇게 설명하고 있습니다. “모래는 사라지고 강은 직선으로 바뀌고 있었다”, “광활한 모래사장은 완전히 파헤쳐졌다. 거미줄처럼 외곽만 남아 4대강 사업 전에는 모래톱이었다는 사실만 어렴풋이 짐작할 수 있을 뿐이다”, “경천교에 이르자 강물은 뿌옇게 변해 하류로 흐르고 있었다. 둔치는 자갈과 모래를 실은 대형 트럭이 분주하게 오가는 공사장으로 변해 있었다.”

답사에 나섰던 학생들은 충격을 받았습니다. 대학생 김재성씨는 “친환경적이라기보다는 예쁘게만 꾸민 청계천처럼 4대강 사업을 추진하고 있다고 느꼈다”고 했습니다. 대학생 신동윤씨는 “잘 흐르는 강을 틀어막고 수많은 생명체가 살고 있는 강을 황무지로 바꿔버리는 4대강 사업 현장은 한마디로 충격적”이라고 소감을 밝혔습니다.

국가명승인 경북 예천 내성천 회룡포의 2020년 10월 11일 모습. 모래가 줄어들고, 자갈이 늘어난 데다 다양한 식물들이 침투하면서 백사장의 모습을 잃어가고 있다. 생태지평 시민생태조사단 제공.
4대강 사업은 완공됐지만 강은 여전히 시름시름 앓고 있습니다. 해당 기사에서 “대한민국 강의 원형”이라고 소개된 내성천도 그 아름다웠던 모습을 잃고 황폐화됐습니다. 영주댐이 건설되면서 내성천 회룡포의 백사장은 자갈밭으로 변했고, 멸종위기 어류 흰수마자도 완전히 자취를 감췄다는 것이 최근 경향신문 보도로 알려졌습니다.(관련기사▶[단독]댐에 물 가두자 국가명승 회룡포가 망가졌다) ‘강은 흘러야 강’이라고 합니다. 인간의 욕심 때문에 망가진 강이 하루빨리 회복되기를 바랍니다.

조해람 기자 lennon@kyunghya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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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5일 별세한 고(故) 이건희 삼성그룹 회장은 1974년 반도체 산업에 뛰어들었으며, 이후 6년 만에 삼성전자를 글로벌 1위 기업으로 만들었다. /삼성 제공

"현재 아닌 미래 봐야"…'반도체·스마트폰' 시장서 삼성전자 1위로 올려

[더팩트│최수진 기자] "언제까지 미국, 일본의 기술 속국이어야 하겠습니까? 기술 식민지에서 벗어나는 일, '삼성'이 나서야지요. 제 사재를 보태겠습니다."

25일 별세한 고(故) 이건희 삼성그룹 회장은 1987년 이병철 삼성그룹 창업주로부터 경영권을 물려받은 이후 장기적 관점에서의 기술 개발 및 과감한 투자 등에 나섰다. 특히, 그의 남다른 선구안은 휴대전화(스마트폰)와 반도체 사업에서 결실을 보며 삼성을 지금의 '초일류 기업'으로 성장시켰다.

◆ 화형식으로 증명한 휴대전화 품질…'애니콜'서 '갤럭시'로 이어진 삼성의 뚝심

전 세계가 인정하는 삼성전자 스마트폰의 품질은 이 회장의 경영철학이 고스란히 드러나는 대표적인 결과물이다.

이건희 회장은 과거 삼성전자의 영향력이 미미했던 휴대전화 시장에서 고객들의 신뢰를 얻기 위해 과감한 결단도 마다하지 않았다. 그 대표적인 일화가 1995년 3월 일어난 '애니콜 화형식'이다.

당시 삼성전자의 무선전화기 사업부는 품질이 제대로 갖춰지지 않은 상태에서 무리하게 완제품 생산을 추진하다 제품 불량률이 무려 11.8%까지 올라가는 심각한 문제가 발생한 바 있다.

이에 대해 이건희 회장은 "신경영 이후에도 이런 나쁜 물건을 만들고, 엉터리 물건을 파는 정신은 무엇인가? 적자 내고 고객으로부터 인심 잃고 악평을 받으면서 이런 사업을 왜 하는가? 삼성에서 수준 미달의 제품을 만드는 것은 죄악이다. 회사 문을 닫는 한이 있더라도 반드시 시정해야 한다"며 문제의 심각성을 강하게 질타했다.

1995년 1월 이건희 회장은 품질 사고 대책과 향후 계획을 점검하면서 고객들에게는 사죄하는 마음으로 무조건 새 제품으로 교환해주는 특단의 조치를 취하도록 했다. 이와 함께 수거된 제품을 소각함으로써 임직원들의 불량의식도 함께 불태울 것을 제안했다.

전 세계가 인정하는 삼성전자 스마트폰의 품질은 이건희 회장의 경영철학이 고스란히 드러나는 대표적인 결과물이다. /삼성 제공

15만 대, 150여억 원어치의 제품이 수거됐고 화형식을 통해 전량 폐기 처분됐다.

그 결과, 애니콜은 그해 8월 전 세계 휴대폰 시장 1위였던 모토로라를 제치고, 51.5%의 점유율로 국내 정상에 올라섰다. 한국은 모토로라가 시장점유율 1위 자리를 차지하지 못한 유일한 나라로 남았다.

이후 이건희 회장은 삼성전자 휴대전화 사업을 직접 챙기기 시작했다. 2002년 나온 '이건희 폰(모델명 SGH-T100, SCH-X430)'은 TFT-LCD(박막액정 표시장치) 패널, 31만 화소 내장 카메라, 동영상 촬영 지원 등을 내세우며 업계 최고 스펙으로 출시됐다. SGH-T100 모델은 국내 최초로 판매량 1000만 대를 기록하며 '텐밀리언셀러폰'으로 등극했다.

판매량 1000만 대 신화는 2004년 나온 '벤츠폰(모델명 SGH-E700)'으로 이어졌다. 벤츠폰은 당시 해외에서 '휴대폰 계의 메르세데스 벤츠'라고 불리는 등 극찬을 받았다.

이후에도 △블루블랙폰 △울트라에디션폰 △SGH-E250 △SGH-D900 등이 판매량 1000만 대를 돌파하며 '휴대전화는 삼성'이라는 독보적인 이미지를 가지게 됐다.

그러나 2007년 애플이 아이폰을 선보이며 글로벌 스마트폰 시장을 점령하기 시작하자 삼성전자의 영향력은 상대적으로 줄어들기 시작했다.

이에 이건희 회장은 2010년 삼성전자 회장으로 복귀해 가장 먼저 휴대전화 사업을 챙겼다. 당시 이 회장은 갤럭시S의 판매량을 100만 대로 설정해야 한다고 강조하며 품질 강화를 주문했다. 그해 삼성전자가 내놓은 첫 스마트폰 '갤럭시S'는 2500만 대 이상의 판매고를 올리며 글로벌 시장에서 다시 한번 인정받게 됐다.

'양'보다 '품질'을 우선시 해야 한다는 이건희 회장의 지론은 스마트폰 시대로 넘어온 현재도 삼성전자가 내세우는 가장 중요한 신조다. 이는 삼성전자가 지금까지도 글로벌 스마트폰 시장에서 1위를 유지할 수 있는 이유이기도 하다.

삼성전자는 1992년 세계 최초로 64M D램 반도체 개발에 성공하며, 반도체 시장에서 메모리 강국 일본을 처음으로 추월했다. /삼성 제공

◆ 반도체, '맨땅에 헤딩'으로 얻은 '세계 1위' 영광

이건희 회장의 선구안은 '반도체' 시장에서도 삼성전자를 글로벌 기업으로 끌어올렸다.

1974년 이건희 회장은 반도체 산업이 한국인의 문화적 특성에 부합하며, 한국과 세계 경제의 미래에 필수적인 산업이라 판단해 불모지나 다름없는 환경에서 반도체사업에 착수했다.

이건희 회장이 파산 직전의 한국반도체를 인수한다고 했을 때 'TV 하나도 제대로 못 만들면서, 최첨단으로 가는 것은 위험하다', '미국 일본보다 20, 30년 뒤처졌는데, 따라가기나 하겠는가?' 등의 반대 의견이 지배적이었다.

특히, 일본의 한 기업 연구소는 '삼성이 반도체를 할 수 없는 다섯 가지 이유'라는 보고서를 내놓으며 비판한 바 있다.

그러나 이건희 회장은 기업을 키우려면 미래에 대한 투자를 진행해야 한다는 신념으로 반도체 사업을 강행했고, 1986년 7월 1메가 D램을 처음 생산하는 성과를 달성했다.

2004년 이건희 회장은 반도체 30년 기념식에서 "반도체 사업 진출 당시, 우리 기업이 살아남을 길은 머리를 쓰는 하이테크 산업 밖에 없다고 생각해 과감히 투자를 결정했다"고 밝혔다.

삼성전자는 반도체 사업에 뛰어든 지 약 6년 만에 세계 1위로 올라섰다. 1992년 세계 최초로 64M D램 반도체 개발에 성공하며, 메모리 강국 일본을 처음으로 추월했다.

이건희 회장은 여기서 만족하지 않았다. 이후 △1998년 미국 오스틴 반도체 공장 준공 △2005년 화성 반도체 2단지 본격 투자 등에 나서며 반도체 경쟁력 강화에 속도를 높였다.

아울러, 기술 격차에도 집중했다. 2001년 세계 최초 4기가 D램 개발, 세계 최초 64Gb NAND Flash 개발(2007), 2010년 세계 최초 30나노급 4기가 D램 개발과 양산, 2012년 세계 최초 20나노급 4기가 D램 양산 등에도 성공했다.

이건희 회장의 끊임없는 투자는 삼성전자가 반도체 시장에서 1위를 유지할 수 있었던 바탕이 됐다. 삼성전자는 1992년 이후 20년간 D램 세계시장 점유율 1위를 지속 달성하고 있으며, 2018년에는 세계시장 점유율 44.3%를 기록하는 기염을 토했다.

jinny0618@tf.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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